
[전광우·손현덕의 통쾌한 경제-8] "오늘날 학생이 부모가 잘 모르는 분야를 하겠다고 하면 이미 반쯤은 성공한 겁니다." 20년 전 미국에서 고등학교에 입학한 제 딸아이의 장래 계획에 관해 상담을 했던 카운슬러가 들려준 얘기였습니다. 컴퓨터게임에 빠져 있던 자기 아들을 굳이 취업에 좋다는 전공 분야로 밀어붙였던 걸 지금에 와서야 후회한다는 친구의 푸념을 들은 적이 있는데, 그럴 때면 새삼 떠올리는 기억이 바로 그 선생님의 말입니다.
미국 캘리포니아 새너제이에 자리한 실리콘밸리는 세계 소프트파워의 메카이자 4차 산업혁명의 프론티어입니다. 구글, 인텔 등은 말할 것도 없고 우버와 같은 신생 벤처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글로벌 혁신기업들이 이곳에 본부를 두고 있죠. 도대체 미국의 막강한 창의력은 어디서 나올까요. '미국에선 되는데 왜 우리나라에선 잘 안되는지'는 자주 부딪치는 의문입니다. 얼마 전 한 콘퍼런스에서 똑같은 질문을 받은 저는 이런 답을 했습니다. '미국 대부분의 집에는 자동차 차고(車庫)가 있는데 한국에는 없어서'라고.
미국에서 차고는 아이들의 놀이터이자 태어나서 처음 가지는 실험실이기도 합니다. 차고는 자동차 공구뿐만 아니라 집에서 사용하는 각종 도구들의 저장 공간이지요. 그렇다 보니 아이들은 그곳에서 새로운 것을 만들어 보고 잘못되면 부수기도 하는, 이를테면 시행착오를 몸소 체험하는 실습장인 셈입니다. 마이크로소프트의 빌 게이츠, 애플의 스티브 잡스, 페이스북의 마크 저커버그 등의 성공신화가 차고에서 시작했다는 건 그래서 우연이 아니죠. 같은 시간에 우리 아이들은 차고가 아닌 학원에서 틀에 박힌 강의에 시달려야 하는 교육환경과 입시지옥의 현실이 정말 안타깝지요.
인적자원의 경쟁력이 뛰어난 민족을 하나 꼽으라면 단연 유대인입니다. 인구 대비 노벨상 수상자가 압도적으로 많고 각 분야에서 수많은 리더를 배출하는 민족이죠. 국제금융계 큰손들도 상당수가 유대계인데, 그들에게 유대민족의 탁월성이 어디서 나오는지 종종 물어봅니다. 제 질문에 공통적인 대답은 가정교육의 차이인데, 특히 아이들과 저녁 밥상에서 나누는 대화의 초점은 학교 성적이 아니라 '오늘 학교에서 어떤 남다른 질문을 했나'라는 겁니다. 노벨상도 좋은 질문에서 출발하고 4차 산업혁명 시대의 경쟁력도 새로운 아이디어에서 시작한다는 거죠.
OECD(경제협력개발기구)가 최근 발표한 '2015년 학생 웰빙 보고서'에 따르면 우리 학생들의 삶의 만족도는 48개 조사 대상국 중 47위로 꼴찌 수준입니다. 주당 60시간 이상 공부하는 학생 수는 OECD 회원국 평균의 두 배가 넘고, 가장 어린 나이에 시작한 사교육 시간도 OECD 평균의 6배에 달하고 보니 시험이나 성적 스트레스 수준 역시 최악이라고 하네요. 운동을 하는 학생 비율이나 부모와 대화하는 시간도 바닥이라고 합니다. 대한민국 미래를 짊어질 학생들의 신음과 고통은 정말 심각한 문제입니다.
본격적인 4차 산업혁명 시대를 맞아 주입·암기식 교육의 혁신이 절실하다는 지적, 어제 오늘 얘기가 아닙니다. 학교와 학원에서 하루 종일 정답만을 강요하는 낡은 학습방식으로 창의적 인재가 생겨날 수 있겠습니까. 입시제도나 사교육을 포함한 교육시스템의 근본적 개혁은 물론 필수 과제이지만, 더 시급한 건 학생 삶의 질을 끌어올릴 체감할 만한 조치입니다. 우선 우리 집에서부터 가끔은 자녀들의 엉뚱한 생각을 격려해주고 과도한 공부의 굴레에서 자유 시간을 좀 갖게 해주면 어떨까요. 창의력은 마음의 여유가 있을 때 생기고 큰 변화도 작은 실천에서부터 출발하는 법입니다.
출처 : 2017. 04. 24 [전광우 전 금융위원장·국민연금이사장]